[김영호 특별기고] 구사재(九思齋)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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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화랑유치원 이사장·교육학박… 작성일20-08-19 17:35본문
↑↑ 새화랑유치원 이사장·교육학박사 김영호입추가 지났지만 연일 폭우가 쏟아져서 전국은 피해가 막심하다. 큰 사태가 발생하여 산촌 마을을 휩쓸었고, 도로가 무너지고 강이 범람하여 농토가 유실되는 등 많은 곳이 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으나, 우리 고장 경주는 그런 피해가 없어서 자고로 경사스러운 도시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경주시에서 재난예방을 위한 문자 메시지를 제 때에 잘 보내준 덕택인 것 같다.
오늘은 비가 그치고 오래간 만에 햇볕이 쨍쨍하고 하늘이 열렸다. 춘향전에 '십년지수(十年之水) 긴 장마에 햇볕 같이 반긴 사랑' ' 칠년대한(七年大旱) 가문 날에 빗발같이 반긴 사랑'이라더니 만유의 일광이 한없는 반가움을 주기에, 향유(鄕儒) 두오(杜塢) 선생과 관곡(寬谷) 동료와 함께 권혁근 사문(斯文)의 안내로 구사재(九思齋)를 찾았다.
이 재실은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에 소재하는 안동권씨 재실이다. 국당리는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향중만이 아니라 널리 잘 알려진 전통 마을이다. 구사재 재사는 임진란 때 동구적개(同仇敵愾)의 뜻을 품은 고을의 장정 노암 김만령, 영풍정 이계수, 낙의재 이눌, 오의정 이의온 등 여러 의사와 더불어 창의하여 요충지인 화왕산을 굳게 지켰고, 경주읍성 수복전에서 판관 박의장 등과 전략을 세우고 정무공 최진립과 금장대에서 작전을 지휘했던 구사재(九思齋) 권복시(權復始, 1558-1636)공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호를 재명(齋名)으로 후손들이 지은 재사이다.
이 건물은 인조 16년인 1638년에 최초로 건립되었으나, 그 후 1862년에 화재로 묘우와 고서가 소실되어 철종 14년(1863)에 구사재정사를 중건하였다고 하며, 이 재사도 세구연심에 퇴락하여 1923년에 내외촌에 다시 신축하여 후손들이 강학의 공간으로 활용해 오다가, 1960년에 내촌으로 이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정 남향의 고색이 창연한 재실이었으나, 우뚝한 건물과 높이 자란 향목이 아담한 경관을 이루었고, 입구 대문채 좌우에 초목이 무성하여 자손번창을 대변 하는 듯하였다.
재사나 정자는 효자나 퇴임관료 및 유현들이 대체로 산수가 좋은 곳에 아담하게 지어 현조의 유덕을 기리고 혹은 조용히 서책을 읽으면서 여가를 보낼 목적으로 지은 집이다. 또한 조선의 유지를 받들어 자손들을 교육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정자는 신라 소지왕이 488년 정월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천천정은 연못을 갖춘 정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누정은 궁실을 위한 원림의 조성과 더불어 군신의 휴식처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차츰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강학하는 장소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구사재공은 단종(端宗)의 이친(姨親)인 첨정 호 죽림 권산해 공의 5세손으로 팔공산과 화왕산회맹 등에 참여하여 동료 의병과 함께 왜병을 살적하는데 전공을 세웠다. 그래서 공훈에 의해 첨정에 제수된 경주의 자랑스러운 의사이다.
특히 공의 당호가 구사재라는 것이 교훈적 이목을 끌게 한다. 구사(九思)라는 말은 구용(九容)과 더불어 이동들에게 가정교육으로 가르친 생활덕목이다. 아홉 가지의 바른 생각과 모습을 각각 구사, 구용이라 하여 올바른 생각과 모습을 하도록 교육했던 것이다.
생각은 마음에서 발하는 것이며, 마음가짐은 예절의 근원적 바탕이요 본질이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인 바뀐다. 그래서 소학에서 군자가 항상 명심해야 할 구사와 구용를 제시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구사는 다음의 아홉 가지를 말한다.
시사명(視思明)은 밝고, 바르게 볼 것, 청사총(聽思聰)은 총명하게 들을 것, 색사온(色思溫)은 온화한 안색을 가질 것, 모사공(貌思恭)은 공손한 외모를 가질 것, 언사충(言思忠)은 말에 충직할 것, 사사경(事思敬)은 일을 경건하게 할 것, 의사문(疑思問)은 의심 날 때는 물을 것, 분사난(忿思難)은 성이 날 때는 어려움을 겪는 것과 견득사의(見得思義)는 이득을 보게 되면 의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이 스스로 당호를 구사라 정한 것은 올바른 생각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군센 의지와 품행의 교훈적 의미가 함의(含意)되었다고 여겨져서, 안동권씨 국당 구사재문중이 올바른 생각을 깨우치게 하는 명문거족임을 구사재의 충의고헌(忠義高軒))에서 다시 느껴본다.
새화랑유치원 이사장·교육학박… kua348@naver.com
오늘은 비가 그치고 오래간 만에 햇볕이 쨍쨍하고 하늘이 열렸다. 춘향전에 '십년지수(十年之水) 긴 장마에 햇볕 같이 반긴 사랑' ' 칠년대한(七年大旱) 가문 날에 빗발같이 반긴 사랑'이라더니 만유의 일광이 한없는 반가움을 주기에, 향유(鄕儒) 두오(杜塢) 선생과 관곡(寬谷) 동료와 함께 권혁근 사문(斯文)의 안내로 구사재(九思齋)를 찾았다.
이 재실은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에 소재하는 안동권씨 재실이다. 국당리는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향중만이 아니라 널리 잘 알려진 전통 마을이다. 구사재 재사는 임진란 때 동구적개(同仇敵愾)의 뜻을 품은 고을의 장정 노암 김만령, 영풍정 이계수, 낙의재 이눌, 오의정 이의온 등 여러 의사와 더불어 창의하여 요충지인 화왕산을 굳게 지켰고, 경주읍성 수복전에서 판관 박의장 등과 전략을 세우고 정무공 최진립과 금장대에서 작전을 지휘했던 구사재(九思齋) 권복시(權復始, 1558-1636)공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호를 재명(齋名)으로 후손들이 지은 재사이다.
이 건물은 인조 16년인 1638년에 최초로 건립되었으나, 그 후 1862년에 화재로 묘우와 고서가 소실되어 철종 14년(1863)에 구사재정사를 중건하였다고 하며, 이 재사도 세구연심에 퇴락하여 1923년에 내외촌에 다시 신축하여 후손들이 강학의 공간으로 활용해 오다가, 1960년에 내촌으로 이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정 남향의 고색이 창연한 재실이었으나, 우뚝한 건물과 높이 자란 향목이 아담한 경관을 이루었고, 입구 대문채 좌우에 초목이 무성하여 자손번창을 대변 하는 듯하였다.
재사나 정자는 효자나 퇴임관료 및 유현들이 대체로 산수가 좋은 곳에 아담하게 지어 현조의 유덕을 기리고 혹은 조용히 서책을 읽으면서 여가를 보낼 목적으로 지은 집이다. 또한 조선의 유지를 받들어 자손들을 교육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정자는 신라 소지왕이 488년 정월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천천정은 연못을 갖춘 정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누정은 궁실을 위한 원림의 조성과 더불어 군신의 휴식처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차츰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강학하는 장소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구사재공은 단종(端宗)의 이친(姨親)인 첨정 호 죽림 권산해 공의 5세손으로 팔공산과 화왕산회맹 등에 참여하여 동료 의병과 함께 왜병을 살적하는데 전공을 세웠다. 그래서 공훈에 의해 첨정에 제수된 경주의 자랑스러운 의사이다.
특히 공의 당호가 구사재라는 것이 교훈적 이목을 끌게 한다. 구사(九思)라는 말은 구용(九容)과 더불어 이동들에게 가정교육으로 가르친 생활덕목이다. 아홉 가지의 바른 생각과 모습을 각각 구사, 구용이라 하여 올바른 생각과 모습을 하도록 교육했던 것이다.
생각은 마음에서 발하는 것이며, 마음가짐은 예절의 근원적 바탕이요 본질이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인 바뀐다. 그래서 소학에서 군자가 항상 명심해야 할 구사와 구용를 제시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구사는 다음의 아홉 가지를 말한다.
시사명(視思明)은 밝고, 바르게 볼 것, 청사총(聽思聰)은 총명하게 들을 것, 색사온(色思溫)은 온화한 안색을 가질 것, 모사공(貌思恭)은 공손한 외모를 가질 것, 언사충(言思忠)은 말에 충직할 것, 사사경(事思敬)은 일을 경건하게 할 것, 의사문(疑思問)은 의심 날 때는 물을 것, 분사난(忿思難)은 성이 날 때는 어려움을 겪는 것과 견득사의(見得思義)는 이득을 보게 되면 의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이 스스로 당호를 구사라 정한 것은 올바른 생각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군센 의지와 품행의 교훈적 의미가 함의(含意)되었다고 여겨져서, 안동권씨 국당 구사재문중이 올바른 생각을 깨우치게 하는 명문거족임을 구사재의 충의고헌(忠義高軒))에서 다시 느껴본다.
새화랑유치원 이사장·교육학박…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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