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인재·선비 배출 많아 박사마을로 유명한 `서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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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작성일20-06-09 19:33본문
↑↑ 서동리 전경.
[경북신문=김영식기자] 구한말 신돌석 장군이 경주 대산성에서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다가 야음을 틈타 양남면 서동리(瑞洞里)로 잠입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신돌석 장군의 의병군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고도의 게릴라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었다. 서동리에 잠입한 날은 영덕 조현 방면의 의병군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이었는데 그만 적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일본군은 신돌석 장군을 후송하기 위해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도록 견고하게 감옥을 지어 장군을 가두었지만 날이 어두워지자 단숨에 감옥을 깨트리고 여유롭게 사라져 버렸다. 탈옥한 신돌석 장군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온산을 뒤흔들었고 일본군은 장군의 웃음소리에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서동리에 전하는 전설이다.
↑↑ 제2발전소 전기부 직원들이 자매마을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신라 때부터 바다마을의 서부 위쪽에 위치했다고 해서 웃서, 혹은 상서(上西)라고 불리던 서동은 비교적 높은 지대 위에 자리잡아 전망이 좋은 편이다. 서동 앞에 있는 산 이름은 안산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 마을 여인이 빨래를 하러 가다가 산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산도 걸어서 갈 수 있나?"고 하자 산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는 전설도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이 마을은 경사스럽다는 뜻을 가진 '상서 서(瑞)'자를 따서 서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 탓인지는 몰라도 해방 이후 지금까지 18명의 박사가 배출됐다. 물론 조선시대 때도 많은 인재와 선비를 배출했던 마을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마을을 '박사마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마을 황보두복 이장의 아들 황보웅 박사도 KAIS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미국 실리콘밸리를 거쳐 지금은 삼성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 마을 최고령자 오필수 할머니와 아들 이웅희씨가 정담을 나누고 있다.
서동리가 '박사마을'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마을에는 양남면에서 최초의 한글학교인 '웃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인근 마을의 청년들은 이 서당에 와서 한문을 배우고 한글을 깨쳤다고 하니 전통적으로 교육적 열기가 가득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외지인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찾아와서는 "이 마을에 와서 살다가 아이를 낳으면 박사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말을 한다고 한다.
서동리는 한 때 경주이씨 집성촌이었다. 마을이 한창 번성했을 때는 80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이 가운데 대부분이 경주이씨였고 황보씨와, 고씨, 양씨가 드문드문 살았다. 그러나 1960년 초 인근 울산이 공업도시로 지정되면서 마을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돈벌이를 위해 떠났다. 그래서 20가구 정도만 남았던 때도 있었다.
↑↑ 바쁜 농사일을 잠시 멈추고 서동리 주민들이 마을회관 앞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현재 서동리에는 65가구 135명의 주민이 살아가고 있다. 이 중 처음부터 서동에서 살던 가구는 불과 23가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외지에서 유입된 인구다. 주로 벼농사와 채소를 재배하는데 이 마을의 채소는 품질이 좋아 가까운 바다마을 횟집에 모두 팔려나간다.
이웅희(68)씨는 중학교까지 서동에서 다니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외지에서 생활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노모 오필수(98)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최근 귀향했다. 이씨는 "어린 시절 이씨 집성촌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친척들이고 전통적인 도덕사회가 잘 보존됐었다"며 "지금은 시대가 바뀌고 산업사회다 보니 당시의 가족적인 분위기가 사라져 많이 아쉽다"고 말했다. 이씨의 노모 오필수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이화여전을 나왔다. 이씨의 부친이 포항 우체국장을 하다가 귀향하면서 지금까지 서동리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오 할머니는 이 마을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 평화로운 서동리의 마을풍경
이기우(66)씨는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평생을 근무하다가 퇴직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씨는 어린시절 4H활동과 새마을 운동을 기억하며 "마을 앞에 흐르는 수렴천의 방죽을 쌓고 도로를 넓히며 다리를 놓았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며 "옛날 함께 자랐던 친구들이 고향마을에 3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외지에서 살아가는 친구들과 매달 만나는 모임을 가지며 어린시절의 평화로웠던 시절을 회상한다"고 말했다.
↑↑ 황보두복(가운데) 이장이 마을 사람들과 마을 발전을 위해 의논을 하고 있다.
서동리의 월성원전 자매부서는 제2발전소 전기부다. 김태석 차장은 "자매결연 이후 매달 마을에 찾아가 식사도 같이 하고 일손돕기, 환경정화 등의 봉사활동도 펼친다"며 "마을분들이 매우 우호적이어서 잔치가 있을 때마다 부서 직원들을 초대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앞으로 이 관계를 꾸준히 이어가면서 마을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지원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경북신문=김영식기자] 구한말 신돌석 장군이 경주 대산성에서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다가 야음을 틈타 양남면 서동리(瑞洞里)로 잠입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신돌석 장군의 의병군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고도의 게릴라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었다. 서동리에 잠입한 날은 영덕 조현 방면의 의병군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이었는데 그만 적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일본군은 신돌석 장군을 후송하기 위해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도록 견고하게 감옥을 지어 장군을 가두었지만 날이 어두워지자 단숨에 감옥을 깨트리고 여유롭게 사라져 버렸다. 탈옥한 신돌석 장군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온산을 뒤흔들었고 일본군은 장군의 웃음소리에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서동리에 전하는 전설이다.
↑↑ 제2발전소 전기부 직원들이 자매마을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신라 때부터 바다마을의 서부 위쪽에 위치했다고 해서 웃서, 혹은 상서(上西)라고 불리던 서동은 비교적 높은 지대 위에 자리잡아 전망이 좋은 편이다. 서동 앞에 있는 산 이름은 안산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 마을 여인이 빨래를 하러 가다가 산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산도 걸어서 갈 수 있나?"고 하자 산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는 전설도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이 마을은 경사스럽다는 뜻을 가진 '상서 서(瑞)'자를 따서 서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 탓인지는 몰라도 해방 이후 지금까지 18명의 박사가 배출됐다. 물론 조선시대 때도 많은 인재와 선비를 배출했던 마을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마을을 '박사마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마을 황보두복 이장의 아들 황보웅 박사도 KAIS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미국 실리콘밸리를 거쳐 지금은 삼성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 마을 최고령자 오필수 할머니와 아들 이웅희씨가 정담을 나누고 있다.
서동리가 '박사마을'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마을에는 양남면에서 최초의 한글학교인 '웃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인근 마을의 청년들은 이 서당에 와서 한문을 배우고 한글을 깨쳤다고 하니 전통적으로 교육적 열기가 가득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외지인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찾아와서는 "이 마을에 와서 살다가 아이를 낳으면 박사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말을 한다고 한다.
서동리는 한 때 경주이씨 집성촌이었다. 마을이 한창 번성했을 때는 80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이 가운데 대부분이 경주이씨였고 황보씨와, 고씨, 양씨가 드문드문 살았다. 그러나 1960년 초 인근 울산이 공업도시로 지정되면서 마을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돈벌이를 위해 떠났다. 그래서 20가구 정도만 남았던 때도 있었다.
↑↑ 바쁜 농사일을 잠시 멈추고 서동리 주민들이 마을회관 앞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현재 서동리에는 65가구 135명의 주민이 살아가고 있다. 이 중 처음부터 서동에서 살던 가구는 불과 23가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외지에서 유입된 인구다. 주로 벼농사와 채소를 재배하는데 이 마을의 채소는 품질이 좋아 가까운 바다마을 횟집에 모두 팔려나간다.
이웅희(68)씨는 중학교까지 서동에서 다니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외지에서 생활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노모 오필수(98)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최근 귀향했다. 이씨는 "어린 시절 이씨 집성촌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친척들이고 전통적인 도덕사회가 잘 보존됐었다"며 "지금은 시대가 바뀌고 산업사회다 보니 당시의 가족적인 분위기가 사라져 많이 아쉽다"고 말했다. 이씨의 노모 오필수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이화여전을 나왔다. 이씨의 부친이 포항 우체국장을 하다가 귀향하면서 지금까지 서동리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오 할머니는 이 마을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 평화로운 서동리의 마을풍경
이기우(66)씨는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평생을 근무하다가 퇴직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씨는 어린시절 4H활동과 새마을 운동을 기억하며 "마을 앞에 흐르는 수렴천의 방죽을 쌓고 도로를 넓히며 다리를 놓았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며 "옛날 함께 자랐던 친구들이 고향마을에 3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외지에서 살아가는 친구들과 매달 만나는 모임을 가지며 어린시절의 평화로웠던 시절을 회상한다"고 말했다.
↑↑ 황보두복(가운데) 이장이 마을 사람들과 마을 발전을 위해 의논을 하고 있다.
서동리의 월성원전 자매부서는 제2발전소 전기부다. 김태석 차장은 "자매결연 이후 매달 마을에 찾아가 식사도 같이 하고 일손돕기, 환경정화 등의 봉사활동도 펼친다"며 "마을분들이 매우 우호적이어서 잔치가 있을 때마다 부서 직원들을 초대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앞으로 이 관계를 꾸준히 이어가면서 마을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지원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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