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상복 경주빵` 제빵 명인 이상복 ˝전국에 이상복 브랜드 알리고 세계화 시키는게 마지막 꿈˝
페이지 정보
이상문 작성일19-11-17 17:58본문
↑↑ '이상복 경주빵' 제빵 명인 이상복
[경북신문=이상문기자] "내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빵을 만듭니다. 이것은 처음으로 내게 빵 굽는 기술을 가르쳤던 스승님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50년간 빵을 만들어 온 '이상복 경주빵'의 제빵 명인 이상복(64)씨는 자신이 빚는 빵 하나하나에 소비자의 건강을 위한 모든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14세 때 고 최영화씨가 경영하던 황남빵에 입사해 올해로 제빵업계에 몸을 담은지 햇수로 50년이 됐다. 양북면 안동리가 고향인 이씨는 그 마을의 특산물인 창호지를 경주시내로 내다 파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황남빵에 처음 입사했다.
이씨는 "처음에는 배달부터 시작했지만 빵을 빚는 스승님과 기술자들의 모습을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언젠가는 스승님과 같은 훌륭한 제빵 장인이 돼야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이상복 경주빵 본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이씨는 틈만 나면 빵을 만드는 연습을 했다. 당시에는 밀가루가 워낙 귀했기 때문에 흙으로 연습을 했다. 그 방법은 스승인 최영화씨가 가르쳐 준 방법이었다. 최씨가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빵집에서 처음 배웠던 방법을 그대로 전수한 것이다.
선배들이 하나 둘 황남빵을 떠나면서 이씨에게 본격적으로 빵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돌아왔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씨는 "흙으로 연습했던 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됐고 직접 밀가루로 정상적인 빵을 만든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해 한 개 한 개 모든 정성을 다했다"고 말했다.
황남빵은 황남동의 원래 자리에 도로가 나면서 황오동으로 점포를 이전하면서 큰 변화를 맞았다. 당시 최영화씨는 일본에서 1080만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제빵 기계를 도입했다. 그 돈은 당시 평범한 집 세 채 정도를 살 수 있는 액수였다. 그러나 기계로 만든 빵은 원래의 맛을 내지 못했다. 엄청난 돈을 들여 산 기계를 한쪽에 밀쳐두고 다시 수제빵을 만들어보니 원래의 맛이 그대로 재현됐다.
이씨는 "역시 음식은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들어가야 제대로 된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고 술회했다.
↑↑ 이상복 명인은 모든 제빵 공정에 직접 참여해 자신의 손맛을 구현한다.
이씨는 "빵 만드는 일에 직접 투입되고도 시간만 나면 여전히 흙으로 연습을 계속했다"며 "일요일에도 열심히 흙으로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승님이 환하게 웃으시던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34세가 되던 해 황남빵에서 퇴사를 했다. 이씨는 "20년 동안 한곳에서 스승님에게 제빵 기술을 전수받았으니 원조 황남빵의 기술 전수자로 자부한다"며 "스승님과 사모님께서 친자식처럼 보살펴주시고 귀히 여겨주신 것을 지금도 깊이 감사한다"고 말했다.
황남빵을 나와 이씨는 많은 방황을 했다. 자신이 가진 황남빵의 원래 기술을 발휘할 곳이라면 이리저리 떠돌았다. 진주에서 경주빵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가게를 차린 후배에게 가서 약 10년 정도 일을 도와주면서 언젠가는 자신의 기술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금의 '이상복 경주빵' 최대환 회장을 만나 인생의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경주의 대표적인 빵 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그것이 3년 전의 일이다.
↑↑ 이상복 경주빵 본가 매장.
이씨는 "오래 전부터 여러 사람들로부터 갖가지 제의를 받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해 왔지만 마케팅의 귀재인 최 회장의 제안을 받고 깊은 신뢰감이 생겨 수락하게 됐다"며 "50년간의 세월에서 축적된 '좋은 빵' 만들기 기술을 제대로 내 이름을 걸고 펼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브랜드를 갖고 난 후에도 자만하지 않았다. 강원도 정선과 영월에서 30만평 가까운 팥농사를 짓는 농가와 계약 재배를 하도록 하고 추수를 하거나 타작을 할 때 반드시 현장에 가서 꼼꼼하게 챙긴다.
이씨는 "자연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 흠이 있거나 마른 팥 한 주먹이 앙금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 앙금은 실패한다"며 "제대로 된 팥으로 빵을 만들어야 농민도 살고 빵집도 산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남면에 있는 앙금 제작공장과 건천의 빵 공장에서 직접 모든 공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철저하게 생산 공정의 처음과 끝을 지켜야 자신이 안심할 수 있는 빵이 된다는 치밀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우리 빵은 처음 구을 때 먹으면 바삭한 맛이 나고 식었을 때는 부드럽고 촉촉한 맛이 일품이며 3~4일 지나면 앙금의 새로운 맛이 느껴지는 독특한 맛을 지니고 있다"며 "이 맛을 전국에 알리기 위해 최근에 유명 쇼핑회사에 론칭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상복 명인은 자신의 빵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꿈도 가졌다. 그는 "대만의 펑리수나 각 나라들의 빵들이 세계화에 성공한 예가 있는데 우리 빵은 결코 그 맛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며 "전국에 우리 빵을 알리고 나서 세계화 시키는 일이 마지막 꿈"이라고 말했다.
↑↑ 이상복 명인은 자신의 제빵기술을 전수받을 제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제빵 기술을 전수할 제자를 키우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50년동안 축적한 기술을 모두 전수하고 싶은데 이 기술을 배울 제자가 나서지 않는 것이 가장 아쉬운 일"이라며 "빵을 만들어 돈을 버는 일보다 제자를 통해 맛을 지켜나가는 것이 가장 바라는 바"라고 강조했다.
'이상복 경주빵'은 지난 2016년 11월 11일 창립해 올해로 3년이 지났으며 현재 경주에는 14개 매장이 있다.
이상문 iou518@naver.com
[경북신문=이상문기자] "내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빵을 만듭니다. 이것은 처음으로 내게 빵 굽는 기술을 가르쳤던 스승님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50년간 빵을 만들어 온 '이상복 경주빵'의 제빵 명인 이상복(64)씨는 자신이 빚는 빵 하나하나에 소비자의 건강을 위한 모든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14세 때 고 최영화씨가 경영하던 황남빵에 입사해 올해로 제빵업계에 몸을 담은지 햇수로 50년이 됐다. 양북면 안동리가 고향인 이씨는 그 마을의 특산물인 창호지를 경주시내로 내다 파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황남빵에 처음 입사했다.
이씨는 "처음에는 배달부터 시작했지만 빵을 빚는 스승님과 기술자들의 모습을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언젠가는 스승님과 같은 훌륭한 제빵 장인이 돼야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이상복 경주빵 본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이씨는 틈만 나면 빵을 만드는 연습을 했다. 당시에는 밀가루가 워낙 귀했기 때문에 흙으로 연습을 했다. 그 방법은 스승인 최영화씨가 가르쳐 준 방법이었다. 최씨가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빵집에서 처음 배웠던 방법을 그대로 전수한 것이다.
선배들이 하나 둘 황남빵을 떠나면서 이씨에게 본격적으로 빵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돌아왔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씨는 "흙으로 연습했던 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됐고 직접 밀가루로 정상적인 빵을 만든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해 한 개 한 개 모든 정성을 다했다"고 말했다.
황남빵은 황남동의 원래 자리에 도로가 나면서 황오동으로 점포를 이전하면서 큰 변화를 맞았다. 당시 최영화씨는 일본에서 1080만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제빵 기계를 도입했다. 그 돈은 당시 평범한 집 세 채 정도를 살 수 있는 액수였다. 그러나 기계로 만든 빵은 원래의 맛을 내지 못했다. 엄청난 돈을 들여 산 기계를 한쪽에 밀쳐두고 다시 수제빵을 만들어보니 원래의 맛이 그대로 재현됐다.
이씨는 "역시 음식은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들어가야 제대로 된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고 술회했다.
↑↑ 이상복 명인은 모든 제빵 공정에 직접 참여해 자신의 손맛을 구현한다.
이씨는 "빵 만드는 일에 직접 투입되고도 시간만 나면 여전히 흙으로 연습을 계속했다"며 "일요일에도 열심히 흙으로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승님이 환하게 웃으시던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34세가 되던 해 황남빵에서 퇴사를 했다. 이씨는 "20년 동안 한곳에서 스승님에게 제빵 기술을 전수받았으니 원조 황남빵의 기술 전수자로 자부한다"며 "스승님과 사모님께서 친자식처럼 보살펴주시고 귀히 여겨주신 것을 지금도 깊이 감사한다"고 말했다.
황남빵을 나와 이씨는 많은 방황을 했다. 자신이 가진 황남빵의 원래 기술을 발휘할 곳이라면 이리저리 떠돌았다. 진주에서 경주빵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가게를 차린 후배에게 가서 약 10년 정도 일을 도와주면서 언젠가는 자신의 기술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금의 '이상복 경주빵' 최대환 회장을 만나 인생의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경주의 대표적인 빵 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그것이 3년 전의 일이다.
↑↑ 이상복 경주빵 본가 매장.
이씨는 "오래 전부터 여러 사람들로부터 갖가지 제의를 받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해 왔지만 마케팅의 귀재인 최 회장의 제안을 받고 깊은 신뢰감이 생겨 수락하게 됐다"며 "50년간의 세월에서 축적된 '좋은 빵' 만들기 기술을 제대로 내 이름을 걸고 펼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브랜드를 갖고 난 후에도 자만하지 않았다. 강원도 정선과 영월에서 30만평 가까운 팥농사를 짓는 농가와 계약 재배를 하도록 하고 추수를 하거나 타작을 할 때 반드시 현장에 가서 꼼꼼하게 챙긴다.
이씨는 "자연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 흠이 있거나 마른 팥 한 주먹이 앙금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 앙금은 실패한다"며 "제대로 된 팥으로 빵을 만들어야 농민도 살고 빵집도 산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남면에 있는 앙금 제작공장과 건천의 빵 공장에서 직접 모든 공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철저하게 생산 공정의 처음과 끝을 지켜야 자신이 안심할 수 있는 빵이 된다는 치밀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우리 빵은 처음 구을 때 먹으면 바삭한 맛이 나고 식었을 때는 부드럽고 촉촉한 맛이 일품이며 3~4일 지나면 앙금의 새로운 맛이 느껴지는 독특한 맛을 지니고 있다"며 "이 맛을 전국에 알리기 위해 최근에 유명 쇼핑회사에 론칭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상복 명인은 자신의 빵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꿈도 가졌다. 그는 "대만의 펑리수나 각 나라들의 빵들이 세계화에 성공한 예가 있는데 우리 빵은 결코 그 맛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며 "전국에 우리 빵을 알리고 나서 세계화 시키는 일이 마지막 꿈"이라고 말했다.
↑↑ 이상복 명인은 자신의 제빵기술을 전수받을 제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제빵 기술을 전수할 제자를 키우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50년동안 축적한 기술을 모두 전수하고 싶은데 이 기술을 배울 제자가 나서지 않는 것이 가장 아쉬운 일"이라며 "빵을 만들어 돈을 버는 일보다 제자를 통해 맛을 지켜나가는 것이 가장 바라는 바"라고 강조했다.
'이상복 경주빵'은 지난 2016년 11월 11일 창립해 올해로 3년이 지났으며 현재 경주에는 14개 매장이 있다.
이상문 iou518@naver.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