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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때마다 '각설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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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북신문 작성일15-10-11 19:39 조회5,4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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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이는 '장타령꾼'이라고 해서 과거 시장이나 길거리로 돌아다니면서 장타령을 부르던 동냥아치를 낮잡아서 이르는 말이다.
 각설이가 등장하는 1인극 '품바'는 김시라가 대본을 썼으며 1981년 초연됐다. 일제 식민지시대부터 자유당 말기까지 전국을 떠돌며 살다가 전남 무안 걸인촌에 정착한 각설이패 대장 천장근의 인생 역정을 각설이타령과 구전민요, 재담, 익살스런 몸짓과 춤사위로 풀어냈다. 1인 14역을 맡은 각설이의 걸쭉한 입담과 타령, 고수의 신명나는 장단, 관객을 참여시키는 마당극 형식, 정치풍자 등이 어우러져 당시에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1996년에는 한국 연극사상 최초 최장기 공연, 최대관객 동원으로 '한국기네스북'에 수록되기도 했다. 1987년과 1993년의 미국 순회공연, 1993년 일본 공연, 1997년 호주 공연 등 해외공연도 가졌으며, 1988년에는 한국 백상예술대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요즈음 축제에 마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메뉴가 있다. 바로 각설이다. 과거 우리의 각설이와 장타령이라면 우리 전통문화의 한 갈래라고 봐서 축제 마당에 등장하는 것을 마다할 리가 없다.
 그러나 요즈음 축제에 등장하는 각설이는 과거 우리 문화 속의 각설이와는 천양지차다. 육두문자가 난무하고 음담과 패설이 횡행하며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천박한 몸놀림이 자행된다. 거기에 시민들은 넋을 놓고 앉아서 박수치고 혼을 빼앗긴다. 각설이들은 급기야 혼이 빼앗긴 연로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검증되지 않는 약품이나 식품, 생활용품을 판매한다.
 문화는 다양성을 전제로 할 때 발전한다. 한 집단만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계층은 싫어하지만 어느 계층의 취향에 부합한다면 그것도 문화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요즈음의 각설이는 지나치다. 벚꽃축제, 신라문화제, 엑스포까지 시민들이 운집하는 축제마당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각설이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지자체가 예산을 투입해 시민들의 정서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마련하는 축제에 이런 판을 벌인다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축제는 시민들의 문화적 역량을 끌어올리는 교육의 장이 돼야 한다. 개인이 만든 장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들이 배울까 겁이 나는 각설이를 공연을 버젓이 눈감아 주는 것은 행정의 직무유기다. 외국인이 본다면 뭐라고 평가하겠는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공식적인 축제 행사에서 각설이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이 설 땅은 따로 있다. 행정은 이 기회에 정신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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